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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감상문

[책] 칼의 노래 -김훈

by jino22 2024. 1. 31.

출처: 네이버 도서

칼로 적을 겨눌 때, 칼은 칼날을 비켜선 모든 공간을 동시에 겨눈다. 칼은 겨누지 않은 곳을 겨누고, 겨누는 곳을 겨누지 않는다. 칼로 찰나를 겨눌 때 칼은 칼날에 닿지 않은, 닥쳐올 모든 찰나들을 겨눈다. 적 또한 그러하다. 
칼은 죽음을 내어주면서 죽음을 받아낸다. 생사의 쓰레기는 땅 위로 널리고, 칼에는 존망의 찌꺼기가 묻지 않는다.(P176)

끼니때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새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를 건너뛰어 앞당길 수도 없었고 옆으로 밀쳐낼 수도 없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P203)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이 두려웠다.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일 것이었다. 나는 고쳐 쓴다. 나는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결국 두려웠다. 이러한 세상에서 죽어 없어져서, 캄캄한 바다 밑 뻘밭에 묻혀 있을 내 백골의 허망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세상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바다에서, 삶은 늘 죽음을 거스르고 죽을을 가로지르는 방식으로만 가능했다. 내어줄 것은 목숨뿐이었으므로 나는 목숨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P209)



말은 비에 젖고, 청춘은 피에 젖는구나· · ·청춘의 날들은 흩어져가고, 널린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 날리네 · · ·젊은것들의 글이었다. 내 칼에 새겨넣은 물들임 염자도 내 마음에 떠올랐다. 내 젊은 적들은 찌르고 베는 시심의 문장가들이었다. (P227)

 

칼의 노래

- 김훈

 


 

책을 다 읽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술술 읽히는 편안한 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순신 장군' 하면 무척이나 대담하고 대단한 위인이라는 단순한 생각만 했었다.

몇개월에 걸쳐 조금씩 이 책을 읽어 나가면서 장군의 삶을 같이 겪어나가는 듯 했다.

그만큼 섬세하게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당시의 전쟁과 사건을 묘사하기 보다 모든 무게를 짊어진 채 살아낸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주인공은 원하는 대로 죽을 수도, 원하는 때 살 수도 없는 삶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갔다.

평온한 환경에서 평온한 마음을 가지고, 치열한 순간을 읽을 수 있게 된 지금을 주신 과거의 모든 당신에게 감사하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삶을 모든 사람이 다 다른 방식으로, 다른 마음으로 살아간다.

소설이 주는 힘이 바로 이것인 것 같다.

하나의 삶 밖에 살 수 없는 사람이 잠시 그 순간만이라도 다른 삶을 엿볼 수 있는 것.

 

특히 김훈 작가의 소설들은 타인의 삶을 담담하고도 아름다운 문체로 보여준다. 

처음에는 적응이 잘 안 됐었는데, 담백한 문장들을 곱씹을 수록 그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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